정약용의 고해(苦海) - 신창호 지음

정약용의 고해(苦海) - 신창호 지음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우리는 고된 날들을 겪으면서도 애써 살아나가야 한다. 우리는 각자가 가진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나름의 답을 찾아간다. 그 과정 가운데, 다른 이가 내린 답을 듣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의 답을 수정한다. 저자인 신창호 교수는 책을 시작하는 장면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삶의 의미’라는 질문은 새삼스럽다. 하지만 언젠가 생이 다함은 필연이기에, 한번쯤은 품을 수 밖에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생의 너머가 가늠이 되고 나서야 미뤄뒀던 질문과 마주할 격이 갖춰질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자신의 삶에서 간절하게 의미를 찾았던 사람들에게 눈길이 간다. 삶은 동화가 아니다. 동화는 “그래서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나지만, 역사에 기록된 삶은 이후에도 계속 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기억되는 인물들의 그 이후 잊힌 삶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그들은 삶의 동인을 어디에서 찾았을까. 이런 의문이 들었을 때 나는 한사람을 떠올렸다. 정약용이다. (4-5쪽)

정약용은 조선후기의 인물로, 관료, 유학자, 실학자, 공학자, 암행어사의 다양항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임금의 총애를 받아 높은 관직에도 오르지만, 모함에 의해 천주교 박해에 휘말려 20년간 유배생활을 한다. 억울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배지에서 수많은 책을 읽고 이를 집대성하여 자신의 학문을 완성한다. 그리고 아직도 널리 읽히고 있는 <목민심서>, <경세지표>, <흠흠신서> 같은 대작을 집필힌다.  그의 간단한 약력을 알고 나면 자연스레 저자와 비슷한 질문이 떠오르게 된다. ‘대체 무슨 힘으로 산걸까? 억울하게 유배를 가서도 어쩜 이리도 성실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질문. 결국 그가 삶에 대해 가진 태도에 호기심이 생기게 된다. 다행히도 정약용은 스스로 자신의 일생을 <자찬묘지명>이라는 글로 요약했다. 옛 선비들은 자신의 묘지명을 쓰며 삶을 정리했다고 한다. 죽음을 전제하고 쓴 글인 만큼,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비밀도 솔직하고 꾸밈없이 담겨있지 않을까. 그 글을 통해 일종의 ‘고해’를 하게 되는 셈이다. 정약용이 손수 지은 고해서인 <자찬 묘지명>을 1인칭 관점에서 재편집한 것이 이 책, <정약용의 고해>이다. 

그의 인생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시절. 그리고 주문모의 체포령으로 시작된 천주교 박해 사건에 휘말리게 되어 시작된 유배 생활. 아래는 정약용의 전성기 시절을 보여주는 구절들이다.

이제 이립(서른)이 된 때를 말하고자 한다. 1792년(정조16) 봄이었다.나는 홍문관에 들어가 수찬이 되었다. 이에 규장각에 나아가 임금께서 내리신 시에 신하들이 화답한 시를 엮어 시집을 편수했다.

이 해 4월에 아버지가 진주에서 이 세상을 떠났다. 나는 급보를 듣고 남원에 이른 후부터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갔다. 한 달이 지난 뒤, 충주에 묘소를 마련하고 장례를 마쳤다. 그리고 고향으로 도랑와서 나머지 장례 의식을 모두 치렀다. 임금께서는 경전 강독을 하던 관릴 보내 몸은 어떠한지 자주 나의 안부를 확인하셨다.(62쪽)

이해 겨울에는 수원에 성을 쌓았다. 훗날 이를 가리켜 화성 건설 사업이라 했다. (…) 드디어 수원 화성이 만들어졌다. 임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행히도 기중기를 쓸 수 있어 4만 냥이나 줄였구나.”(64쪽)

특별히 병조참의를 맡아 임금을 모시고 호위토록 하셨다. 그만큼 임금께서는 나를 신뢰하셨다. 나를 그토록 믿으셧다. 감당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 화성에서 임금을 모시고 있을 때는 임금께서 베푸는 잔치에도 참석했으니 자못 깊은 사랑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74쪽)

정약용은 정조가 ‘자못 깊이 사랑’하는 신하로서, 뛰어난 글쓰기 실력 뿐 아니라 기중기의 발명을 통해 국책사업의 비용을 줄이기도 한 엘리트였다. 상승가도를 달리던 인생 곡선은 정조가 죽고, 순조가 임금의 자리에 오른 시점에 변곡점을 맞이한다. 순조는 조선의 유학/계급 사상을 반대하는 천주교를 핍박하기 시작한다. 정약용은 천주교 서적을 잠시 접하기만 했을 뿐 천주교인이 아니었고, 많은 신하들도 그의 무고를 지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암행어사 일로 얽혀 원한을 갖게 된 서용보였다. 그의 거짓증언에 의해 정약용의 유배생활이 시작된다.

해가 바뀌어 새 임금께서 오르셨다. 1801년(순조 1)  봄, 태비인 정순왕후가 천주교를 믿거나 관련된 사람에게 엄벌을 내리겠다는 명령을 내렸다. ‘코를 베어 멸망시키겠다!’라는 강력한 경고도 나왔다. (…) 2월 8일, 사헌부오 사간원 양사에서 죄가 의심스러워 임금께 보고한다는 구실을 핑계로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을 신문하기를 요청했다. 우리 모두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나의 형 약전과 약종, (…) 등도 모두 차례로 옥에 갇혔다. (117쪽)

여러 관료들이 대부분 내가 석방되기를 논의하는데, 암행어사 당시 얽혔던 서용보만이 석방시켜서는 안 된다고 고집했다. 그래선 나느 경상도 포항의 장기현으로 귀양살이를 가게 되었고, 나의 형 약전은 전라도 완도의 신지도로 유배지가 정해졌다. 그러나 나의 형 약종을 비롯한 나머지는 모두 중형을 면하지 못했다. (118쪽)

유배생활을 시작한 그는 수천권(!)의 책을 읽고 탐구했다. 그렇게 얻은 깨달음을 책으로 엮어 형인 약전에 보내어 소통했다. 그가 유배생활 동안에 쓴 책은 총 260여권의 방대한 양이다. 시율 18권, 잡문으로 전편 36권 후편 24권, 그밖에 잡찬, 경세유표 48권, 목민심서 48권, 흠흠신서 30권, 아방비어고 10권, 전례고 2권, 대동수경 2권, 소학주관 3권, 아언각비 3권, 마과회통 12권, 의령 1권.

나는 일생동안 육경과 사서로 나의 몸을 닦아왔다. 그리고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흠흠신서>, 이렇게 일표와 이서를 지어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고자 했다. 육경사서와 일표이서로 보면 나는 내 나름대로 내 학문에 대한 이론과 실천의 본말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알아주는 이는 적고 나무라는 이는 많다. 나의 이런 견하를 하늘이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저 훨훨 타고 있는 하나의 횃불로 육경과 사서의 주석들, 그리고 일표이서를 모조리 태워버려도 좋다. (233쪽)

그가 이렇게 많은 책을 쓴 이유는 위의 문단에 담겨있다. 그는 ‘학문에 대한 이론과 실천의 본말을 갖추어’ 학문의 끝을 완성짓고 싶어했다.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데 도움이 되어’ 하늘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랬다. 다양한 학문체계를 통합-발전시키고 싶었던 학자로서의 꿈과, 좋은 나라를 만드는데 일조하고자 했던 신하로서의 꿈. 유배 전에 못다 이룬 꿈을 그는 유배지에서도 끊임없이 일군 것이다. 그리고 <자찬묘지명> 마지막 부분에 그는 일생을 마무리 하는 글을 담는다. 

나의 삶은 모두 그르침에 대한 늬우침으로 지낸 세월이었다. 이제 지난날을 거두고자 한다. 거두어 정리하고 일생을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진정으로 올해부터 빈틈없이 촘촘하게 내 몸을 닦고 실천하며, 저 하늘의 밝은 명령, 나의 본분이 무엇인지 돌아보면서 내게 주어진 삶을 나아가고자 한다.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겠다. 다만 내가 죽으면 집 뒤에 정남쪽으로 향해 있는 언덕에 묻히고 싶다. 내 삶의 기록은 내가 수습하고자 한다. 이에 미리 내가 묻힐 곳에 무덤의 형태를 그어놓고, 내 평생의 언행을 대략 기록해 묘지문으로 삼는다. 나 같은 죄인의 글을 누가 새겨줄지 감히 바라지 못 하겠다. 그럼에도 묘지에 새길 글을 이렇게 남기고 싶다. 

네가 기록한 너의 선행, 여러편 글로 묶였구나.

그 숨겨진 잘못된 일까지 일일이 다 적을 수는 없으리라.

너는 이렇게 말하겠지, 나는 사서와 육경을 안다고.

허나, 그 행실을 살펴보라. 너무나 부끄러울수 밖에 없지 않은가.

너는 칭찬을 바라겠지.

허나, 누구도 이끌어줄 수는 없으리라.

어찌 온몸으로 증명하여 드러내 빛내고 싶지 아니하랴만,

이제 너의 어지러움을 거둬들여 미쳐 날뛰던 일들은 그만두도록 하자.

머리 숙여 훤히 들어나도록 전념하니, 마침내 축하의 말이 있으리라.

(238-240쪽)

정약용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했고, 마지막 순간에도 하늘의 명령과 자신의 본분에 귀 기울이려 애썼다. 그것이 정약용의  ’삶의 의미’이자 목표였다. 정약용의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대로 본받기에, 그는 너무 큰 꿈을 꾸고 있지 않았나 싶다. 나는 학문을 완성하거나, 세상의 구조를 개혁하는 것까지 바라는 사람은 아니다. 그의 꿈과 방향은 비슷하겠으나, 그보다는 더 소박하고 작은 꿈이 마음에 든다. 세상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공부하는 것,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더 행복한 삶을- 살도록 힘을 보태는 것. 이 정도가 정약용의 삶에서 느낀 공통 분모다. 아마, 그처럼 대단한 성과를 이루거나 학문적 깨달음을 얻기는 힘들것이다. 그의 유배생활처럼(무려 20년이다!) 힘든 일이 닥친다면 그처럼 의연하게 정진하는 것 또한 힘들 것이다. 다만, 내 능력껏 실천 할 수 있는 일들에 힘을 기울여, 언젠가 끄적일 나 자신의 <자찬묘지명>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애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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