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촌수필

관촌수필

서명: 관촌수필
저자: 이문구
출판사: 휴이넘

관촌수필.

박찬욱 감독의 추천 리스트에 담겨있는 책이다.
문학에는 워낙 소질이 없고, 아는 바도 없어서 접하기 힘들어 하던 차에
인상적인 감수성을 가진 박찬욱 감독의 추천이라 편하게 책을 고를 수 있었다.
책 표지에는 따뜻한 온돌방에 뒹구는 어린아이가 그려져 있다.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었기에, 순박하고 다정한 메시지가 담겨있을 것이란 기대를 품고 책장을 열었다.

관촌수필은 관촌이라는 농촌 마을에서 자란 주인공이 성인이 되어 지난 추억을 되짚어 보는 식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일본 치하, 독립, 남북 분리, 6.25전쟁을 모두 겪으며 자란 어린 시절을 되짚고 있다.
격동의 시기를 서술하다보면 특정한 정치적 견해를 담아 글을 썼음직도 하건만,
저자는 그러한 눈은 배제한채, 역사적 사건 속에 살아 숨쉬는 사람들과 함께
숨쉬고, 즐기고, 안타까워 하던 어린 아이의 독백으로 소설을 한 가득 채운다.

그 중 몇몇 장면들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복이 뒤만 따라다니면 모든 걸 내 맘대로 장난해도 겁날게 없던 그리운 시절……
그것은 내가 일곱 살 나던 해부터 한 2년 남짓한 짤막한 세월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다시금 꿈결 속에 본 대자연처럼 그지없이 아름답고,
은하수를 헤엄쳐 가는듯한 향수에 잠기게 하며,
때로는 나 혼자나 알고 죽을것 같이 비밀스럽고, 
혹은 물려줄 수 없는 소중한 재산처럼 여겨지곤 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벗을 떠올리며, 살아온 날들 중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고 고백한다.
많은 이들은, 그리고 나는 어린 시절 느꼈던 어렴풋한 감동을 근거로 하여 살아간다.
‘그 땐, 참 좋았지. 어리석고, 부족하고, 어렸지만 아름다웠어’.
얼마 전 친구와 나눈 대화를 떠오르게 한 이 문구는 우리네 삶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짚어주는 것 같다.

삶을 통해 아름다움을 담아가는 것.

비록 그 자리를 떠나고, 시간을 흘려보내고, 매 순간을 견뎌야 하는 삶을 살아가더라도
각자의 마음 속에 담긴 아름다운 기억은 살아가는 힘과 근거로 작용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기는 지나가기 마련이다.
특히 격동의 시기를 견뎌내신 어르신들의 시기, 소설 속의 시기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가 그렇게 의지하던 대복이는 어느새 도둑으로 변해버리고, 전쟁에 징집 되어버린다.
가까이 지내던 중년의 석공은 아깝기 그지없는 삶과, 그에게 의지할 뿐인 가족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난다.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 여기던 옹점이는 마땅한 거처 없는 괴로운 삶을 살았으며,
피난 중에 과부가 되어버린 솔이 엄마는 그나마 새로하게 된 혼인도 실패한다.

친구 대복이가 징집되는 날을 표현한 문구를 인용하면,
“만세와 군가는 그로부터 얼마 안 돼 이틀이 멀다고 되풀이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그 일을 그저 시키니 한다는 투로 무의미하게 반복했다.
하물며 그 군대에 나간 가족이나 친척이 전혀 없었던 나의 경우에는, 단 한번의 예외가 있었을 따름이다.
단 한번의 예외.
그거은 군대보낸 가족들의 그 비절했던 심정을 한꺼번에 이해할 수 있었던,
그리하여 무른 전쟁의 가증스러움, 목숨의 허무함, 인생의 허무함, 생활이란 것의 속절없음,
세월의 덧없음을 조금씩 깨치기 비롯하고, 알면서 살고 싶은, 쉬운 말로 느낌을 가져온 계기이기도 하다.
대복이가 출정하는 것을 지켜본 날, 예외란 바로 그날이었다.”

인생은 아프다.
어린 것이 견디기에 세상은 너무 아프다.
주인공이 겪어야 했던, 절친한 이의 타락과 강제징집은 그 아픈 세상에 대한 감을 갖게 한 사건이다.
인생의 허무함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 번에 깨달아 버린 이 아이의 경험은
사실 우리의 그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잔인함의 정도는 다를 것이나, 우리는 작은 스침에도 상처를 입는 시기를 통해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설은 삶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동시에 비춘다.
주인공의 삶은 이러했는데 이 글을 읽고 있는 너의 삶은 어떠냐며 말을 거는 자세를 유지한다.

이 글이 이토록 많은 이들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키며, 
시간이 지나도 명작으로 분류되어 서울대 교수진들의 추천평을 받고, 
박찬욱 감독이란 걸출한 예술가가 추천하는 작품이 된 것은
‘삶이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조용히 알려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이란 것, 
리얼이 아니라는 이유로 멀리했던 장르의 글은
사실 ’이게 진짜야’라며 억지로 떠먹이는 글들 보다
삶의 진면모를 잘 비춰주는 것 같다.

Share on: